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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다

파르티잔 홍범도

by 다가감 2023. 9. 3.

주진오 교수님 페이스북에서 담아옴 (https://www.facebook.com/100000104334973/posts/pfbid02y6ahx7iirLyx3USZEwZhjoDNCyF5CJnoEeK67aBRVmDMAQHG4H8LNkhkAy6JjeXvl/?mibextid=cr9u03 )


"나는 지금 늙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지금 파시스트들과 전쟁을 한다. 젊은이들! 모두 무기를 잡고 조국을 위하여 용감하게 나서라!"
-이전 파르티잔 홍범도-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신문 [레닌기치] 1943년 11월 7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홍범도 장군의 유언이 되었지요. 실제로 그는 독소전쟁에 참전하겠다고 자원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는 평민 출신의 산포수였기 때문에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19년에 강연을 준비하면서, 당시 언론이나 주변 사람들의 회고담에 나타나는 것만 모아 보았어요.

“나는 국권의 회복을 뜻한 이래로 이미 10년의 성상을 지냈으며 공공연하게 독립의 의군을 일으켜 한족의 독립을 힘써 외친 이래 1년 반을 지냈다.
그 사이에 고국산천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영토에 유리 전전하여 비참한 생활을 꾸려 나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로부터 돈과 곡식의 의연을 받은 것이 참으로 많은 바 있다.
이제 만일 우리의 의지가 좌절되거나 일본이나 세계 각국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면 반드시 우리는 물론 고통스러운 바가 될 뿐 아니라, 우리 의군을 위하여 돈과 곡식을 제공하고 자기의 생활에 고통을 느끼고 있는 우리 동포들에게 무슨 명목이 있겠는가?
동포는 우리에 대하여 독립의 미명을 빙자한 강도단이라고 하여 우리를 버릴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천지에 몸을 둘 곳이 없기에 이를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 일이다.
나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소지관철에 분투함으로써 한족독립을 최후까지 힘을 다하여 외쳐, 죽은 후에야 그쳐야 한다는 것을 항상 부하에게 훈시하고 있다…·”

봉오동 전투 직후에 열렸던 동포들의 환영회에서 했던 말씀인데요. 동포들의 도움에 대한 고마움을 절절하게 표현하면서 독립군들이 어떤 자세로 싸워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언제나 계급장도 없는 일개 졸병과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으며 지휘도나 권총을 차지 않았고 장총 두 자루를 휴대하였다.
그는 일상 이렇게 말했다. 지휘도나 권총을 왜 차는가? 그것으로 왜놈을 잡는가? 제 동료나 죽이는데 쓰는 것이지. 이런 장총이라야 왜놈을 죽여.
그는 이렇게 말할 때면 버릇처럼 장총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그의 부관의 말에 의하면 장군의 신품 38식 총은 봉옷골 전투에서 노획한 전리품인데 장군이 친히 골라서 두 자루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 그의 사격술은 유명하여 빈병을 높이 던져 놓고 좌우로 마음대로 명중시켰다고 한다.“

홍상표가 쓴 [간도독립운동소사]에 기록된 내용인데요. 그는 결코 권위를 내세우는 지휘관이 아니었습니다.

"홍범도의 성격은 호걸의 기풍이 있어서, 일반 조선인들 특히 그 부하들로부터 하느님과 같은 숭배를 받고, 각 독립군이 단호한 결심이 없음을 분개하고 단독 행동을 취하며 함남 삼수 갑산 방면으로부터 국경을 습격하여 여론을 환기시키고 독립군의 의기를 보이려고 하는 등 본격적 기백을 토로"

조선총독부 발행 [일본군의 간도출병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홍범도를 잡기 위해 힘을 기울였던 적들조차 그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있지요.

1941년에 태장춘이 써서 고려극장에서 상연했던 [홍범도] 관람하고 난 후에, '너무 자신을 멋지게 표현했다'는 감상평을 남겼습니다. 한편 당시 장군의 일생을 기록했던 김기철의 증언을 통해, 그가 어떻게 스탈린 시대에 살아남았는지 알 수 있어요.

"홍범도 장군께서 파쟁에 참가하지 않고 얼마나 공평정대하게 행동하였는지, 그 가혹한 나날에도 감히 그를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홍장군은 그 당시 검거망에 걸리지 않은 거의 유일한 빨찌산 로병이다.
가끔 장군은 귀속말로 ‘조심해, 걸리지 말아라’ 하고 타일러 주시곤 하였다. 갈밭 속에서 살길을 찾아 헤매는 동포들의 운명에 대해서 장군은 큰 관심을 가졌다."

톰스크시의 소련중앙고문서고에 보관되어 있다는 [적위병 및 붉은 빨치산의 이력서 제 05606호]에는 이렇게 자필로 기록했습니다. 최근에 널리 알려진 1921년 소련에 정식으로 입국할 때 작성한 서류와는 약간 차이가 있어요.

성명-홍범도
생년월일-1868년 8월 27일
민족별-조선인 /사회출신-빈농민 /지식정도-자습자
직업(전문)-혁명가 /현직-1929년부터 년금생활
당별-로씨야공산당(볼쉐위크) 당원당증번호-5784492
가정형편(가족수, 성명 및 년령) -처 리인복 60세
1919~1920년간 어디서 무엇을 하였던가? -홍범도부대에 있으면서 일하였다.
무슨 공로로 상을 받았는가?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모젤권총과 금화 100루블을 상받았다.
어떤 일반적 및 정치학교를 다니였는가? -정치학교

제가 가지고 있는 홍범도 장군의 관련기록들을 공유합니다. 사료와 증언을 정독해 보시고 , 여러분이 직접 판단하시기 바래요. 특히 역사교사들께서 많이 활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홍범도, #파르티잔, #나치와싸운프랑스파르티잔, #주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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